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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읽다,세상을보다

애매함을 견디는 것이 능력이다

 

 

저는 워낙 성격도 급하고, 평소에도 좋고 싫고 가 분명하기 때문에, 살면서도 우유부단하거나 애매하게 말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의 강의를 통해 또 하나의 중요한 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애매함이 우리 일상 속에서 소통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며, 미래의 삶에서도 꼭 가져야 하는 마인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이 강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참된 대화는 둘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확실성을 기꺼이 보류하려고 하는 것이다' 를 기억하면서 오늘의 강의를 시작해볼까요?

 

 

 


 

 

 

 

 

2002년 여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턴 케이프에서 이색적인 이장식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20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사라 바트만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당시에 그 지역은 유럽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이분은 굉장히 신체가 기형적인 모습이어서 유럽으로 데려간 후 광장이나 서커스장에서 전시를 하면서 돈을 버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는데요. 인기가 사라지자 사라 바트만은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했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가 27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박제를 만들어서 프랑스 박물관에 오랫동안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혹한 운명을 벗겨준 사람은 만델라 대통령인데 프랑스 정부와 1940년부터 끈질긴 협상 끝에 2002년에 본국으로 소환돼서 땅으로 묻히게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저 시절로 돌아가서 저런 모습의 여성을 보았으면 어떻게 느끼셨을까요? 보통은 2가지로 나눕니다. 정말 특이하다 재밌다의 반응과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저렇게 할 수가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대상을 나와 똑같다고 볼 수도 있고 나와 다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우리는 생명으로써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별이라는 것은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차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대게 같은 것보다 다른 것에 주목을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른 것이 부담이 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다를 때입니다. 내가 튀거나 특이하다는 취급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의 생각과 습관이 다른 사람과 이질적인 것을 견디지 못하고 가능하면 같은 사람끼리 어울리고 그 안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특히 우리의 정치적인 입장과 사회적인 견해는 굉장히 비슷한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것이 다양한 시대일수록 더하다는 관찰 결과가 있습니다. 필터 버블이라는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비슷한 것만 받아들이고 이질적인 것들은 바깥으로 배제하는 겁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건은 버블이란 건 거품이기 때문에 터질 수밖에 없고 시한폭탄입니다. 터졌을 때 우리의 자태는 패닉에 빠집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비슷한 무리끼리 똘똘 뭉치려고 하고, 가급적이면 그 안전한 경계선 안에서 안주하고 싶어 해요.

 

 

 

 

 

 

 

 

사실 가장 안전한 것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백신을 맞는 겁니다. 백신은 한마디로 애매함입니다. 애매함이란 이도 저도 아닌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걸 싫어하고 불편해해요. 될 수 있으면 둘 중 하나로 결정을 짓고 싶어 하고 명료 해지는 걸 좋아합니다. 애매함은 미덕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네트워크로 얽혀 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생성이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열려있어야 되죠.

 

 

꼰대의 정의는 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건 마음이 닫혀 있다는 거죠. 거기에 반대되는 게 인지적 유연성입니다. 마음이 열린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프레임과 인지의 틀을 내려놓고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어라는 유연성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핵심 개념은 판단 중지라는 겁니다. 우리가 본질이 모호한 사태를 볼 때 서둘러서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데, 여기서 필요한 미덕은 판단 중지하고 결론을 유보하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명확해지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이 '참된 대화는 둘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확실성을 기꺼이 보류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대화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단정입니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그 사람의 말은 속뜻이 따로 있다고 규정을 해버리는 거죠. 단정을 하는 순간 마음을 열 수가 없기 때문에 대화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애매함을 마음속에 간직할 때 소통이 훨씬 부드러워져요. 

 

 

우리는 모두가 애매한 존재입니다. 누군가 나를 외적인 범주로 규정을 해버리면 나 자신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런 존재가 돼버립니다. 그 사람을 진짜 알기 위해서는 그런 걸 다 걷어 버리고 어떤 것으로도 담을 수 없는 그 애매함을 행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교육 자체가 워낙 정답을 강요하고 대화를 할 때도 성급합니다. 그 사람이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의 결론을 굉장히 중요해합니다. 이런 문화에 살다 보니까 애매한 것은 불편한 것이고 거북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특정 사물을 틀에 가두지 않고 그저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이것이 애매함이 갖고 있는 힘이죠. 내가 뭔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서슴없이 다가갈 때 거기서 우리가 몰랐던 잠재력이 자라납니다. 그게 바로 창의성과 다양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매함이란 불편함이나 답답함이 아니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선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www.youtube.com/watch?v=2b7kQANcVRY